상하이 파견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상하이 파견군은 1932년과 1937년 두 차례에 걸쳐 편성된 일본 제국 육군의 부대이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당시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의 지휘 하에 중국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시라카와 사령관의 사망으로 해산되었다. 1937년 제2차 상하이 사변 발발 후 재편성되어 상하이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후 중지나 방면군에 편입되었다가 1938년 폐지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제1차 상하이 사변 - 훙커우 공원 사건
훙커우 공원 사건은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 기념 행사에 폭탄을 투척한 의거로, 한국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중국의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냈으며 윤봉길 의사의 희생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 제1차 상하이 사변 - 상하이 해군특별육전대
상하이 해군특별육전대는 1920년대 상하이에 주둔한 일본 해군 육전대에서 시작하여 상하이 사변과 중일 전쟁에 참전, 일본 해군의 주력 부대로 활동하다 태평양 전쟁 말기 웨이크섬 수비 후 해체되었다. - 1938년 해체된 단체 - 남의사
남의사는 1932년 장제스가 결성한 중국 국민당 내 비밀결사 조직으로, 파시즘을 모델로 권력 강화와 통치 기반 공고화를 위해 테러 활동을 자행했으며, 대한 독립 운동가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 1938년 해체된 단체 - 소협상
소협상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가 헝가리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결성한 동맹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복귀를 저지하는 데 기여했으나 독일의 부상으로 약화되어 해체되었다.
상하이 파견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 | |
명칭 | 상하이 파견군 |
로마자 표기 | Shanhai-haken-gun |
군사 정보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종류 | 보병 |
역할 | 군단 |
주둔지 | 난징 |
역사 | |
창설 | 1932년 2월 23일 |
해체 | 1932년 6월 27일 |
재편성 | 1937년 8월 15일 |
재해체 | 1938년 2월 14일 |
작전 | |
주요 전투 | 제1차 상하이 사변 제2차 상하이 사변 중일 전쟁 |
지휘부 | |
최종 상급 부대 | 중지나 방면군 |
담당 지역 | 중지 |
최종 위치 | 장쑤성 난징 |
2. 역사
1932년 2월 25일, 제1차 상하이 전투의 증원군으로서 처음 편성되었다. 4월 29일,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윤봉길 의사에 의해 훙커우 공원에서 폭사하면서 상하이 파견군은 해산되었다.
1937년 8월 13일 상하이 전투가 발발하자 상하이 파견군이 재편성되었다. 상하이 전투는 난징 전투로 이어졌고, 일본군은 패잔병 처리라는 명분을 내세워 난징 대학살을 자행했다. 1938년 2월 1일, 상하이 파견군은 중지나 방면군에 병합되었고, 중지나 방면군은 2월 14일에 폐지되어 중지나 파견군으로 재편성되었다.
2. 1. 제1차 상하이 사변 (1932년)
1932년 2월 25일, 제1차 상하이 사변의 증원군으로서 처음 편성되었다. 초대 사령관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었다.[1] 상하이에서 19로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쇼와 천황의 요청에 따라 전역 확대를 신중하게 진행했다. 그 결과, 5월 5일에 정전 협정 조인에 이르렀다.4월 29일 상하이 천장절 폭탄 사건으로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사망하면서, 상하이 파견군은 해산되었다.
2. 2. 제2차 상하이 사변 및 중일 전쟁 (1937년 ~ 1938년)
1937년 8월 13일, 상하이 전투가 발발하자 재류 일본인 보호를 명목으로 상하이 파견군이 재편성되었다. 이는 루거우차오 사건에서 시작된 제2차 상하이 사변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1] 1937년 8월 15일 임참명 제73호에 따라 상하이 파견군 편성이 하령되었고, 9월 11일 임참명 제101호에 의해 상하이 파견군 전투 서열이 하령되었다.[1]상하이 파견군은 당초 천황 직할 부대였으나, 참모본부의 전쟁 확대 반대 방침에도 불구하고 난징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그 결과, 11월 7일 새로 편성된 중지나 방면군에 편입되었고, 12월 1일에는 대륙명 제7호로 중지나 방면군 전투 서열이 하령되었다.[1]
상하이 전투는 난징 전투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패잔병 처리라는 명분을 내세워 난징 대학살을 자행했다.[1] 1938년 2월 1일, 상하이 파견군은 중지나 방면군에 병합되었고, 중지나 방면군은 2월 14일에 폐지되어 중지나 파견군으로 재편성되면서 상하이 파견군은 폐지되었다.[1]
3. 지휘부
상하이 파견군은 초대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 대장과 참모장 다시로 간이치로 육군 중장을 시작으로, 이후 마쓰이 이와네 육군 대장, 아사카 야스히코 육군 중장 등이 사령관을 역임했다. 이누마 마모루 육군 중장은 참모장을 역임하였다.
3. 1. 사령관
순서 | 이름 | 직책 | 취임일 | 퇴임일 |
---|---|---|---|---|
1 | 시라카와 요시노리 | 육군 대장 | 1932년 2월 25일 | 1932년 4월 29일 |
2 | 마쓰이 이와네 | 육군 대장 | 1937년 8월 15일 | 1937년 12월 2일 |
3 | 아사카 야스히코 | 육군 중장 | 1937년 12월 2일 | 1938년 2월 14일 |
3. 2. 참모장
이름 | 기간 | 종료 | |
---|---|---|---|
1 | 다시로 간이치로 육군 중장 | 1932년 2월 25일 | 1932년 4월 29일 |
2 | 이누마 마모루 육군 중장 | 1937년 8월 15일 | 1938년 2월 14일 |
4. 예하 부대
상하이 파견군은 제1차 상하이 사변과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서로 다른 부대 구성을 보였다.
4. 1. 제1차 상하이 사변 (1932년)
4. 2. 제2차 상하이 사변 (1937년)
제3사단, 제9사단, 제13사단, 제101사단, 후지시게 지대 (대만 수비대 기반), 야전중포병 제5여단5. 주요 참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